여기, 음악이 빛난다
허클베리핀 4집 <환상...나의 환멸>
사람이 다 그렇다. 같은 일을 오랫동안 하다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기 마련이다. 초심은 물러지고 타성이 생긴다. 뮤지션도 마찬가지다. 꾸준히 좋은 작품을 발표하는 뮤지션은 손에 꼽힌다. 대부분 어느 시점을 지나면 앨범에서 한 두 곡 빼고는 들을 게 없는, 범작을 내놓는다. 초기의 결기는 사라지고 익히 짐작할 수 있는 수준의 음악으로 생명을 이어나간다. 평범한 인간의 속성이다. 그러나 허클베리핀은 그렇지 않다. 그들의 네번 째 앨범 <환상...나의 환멸>은 또 하나의 초심이다. <18일의 수요일> <나를 닮은 사내> <올랭피오의 별> 이렇게 석 장의 앨범을 내는 동안 단 한번도 잃어버린 적 없던, 그들의 초심은 <환상...나의 환멸>에서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심지처럼 불꽃을 피워올린다.
그들이 지켜왔던 초심, 한국 대중음악계에서의 독자적 위치, 그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사변과 은유의 가사, 무엇보다 쉽게 잊혀지지 않는 웰 메이드 음악의 힘으로 허클베리핀은 앨범을 낼 수록 저변을 넓혀올 수 있었다. 초기에는 소수의 지지자로 시작했지만 <올랭피오의 별>에 이르러서는 국내 유수의 매체들이 허클베리핀의 인터뷰를 비중있게 다뤘다. <올랭피오의 별>이후 3년, 그들의 새 앨범은 장르를 막론하고 음악 관계자들 사이에서 가장 기대되는 앨범으로 꼽혀왔다. 음악에 있어서 그 퀄리티보다는 가수가 퍼뜨리는 가십이 중요해지고, 예술가의 자의식 보다는 대중의 트렌드만 좇기 급급해진 시대다. 이런 환경에서도 꾸준히 자신들의 길을 걷되,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왔던 허클베리핀에 대한 음악 관계자들의 기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허클베리핀의 네번째 앨범 <환상...나의 환멸>은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이 앨범은 <올랭피오의 별>과 마찬가지로 100% 자주제작으로 만들어졌다. 기본적인 레코딩은 그들의 작업실에서 이뤄졌고 <나를 닮은 사내>때부터 꾸준히 호흡을 맞춰온 ’토마토 공격대’에서 후반작업을 했다. 보컬 이소영이 기본적인 레코드 엔지니어링을 맡았고 드럼 김윤태는 앨범의 커버 아트를 담당했다. 리더 이기용은 앨범의 타이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환상이란 살아가는 이유다. 희망이나 꿈이 있기에 어려운 현실을 이겨낼 수 있다. 그러나 환상에는 반드시 환멸이 따른다. 역시 현실이 환상을 순순히 이룰 수 있도록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환멸을 거쳐야 다시 환상으로 갈 수 있고, 그 반복되는 과정이 음악하는 사람에게는 특히 필요한 것 같다." 상대적으로 직설적인 앨범 타이틀이 말해주듯, 이 앨범은 허클베리핀 스스로의 자세를 다져 잡는 작품이기도 하다. 지난 앨범에서 불었던 서정의 바람대신, 로큰롤이 질주한다. 데뷔 앨범 만큼이나 스트레이트하지만 곡의 구성과 편곡, 사운드에 있어서는 그에 비할 수 없이 유연하다. 10년동안의 성장이 그 직선적인 사운드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첫 곡이자 타이틀 곡인 ’밤이 걸어간다’는 현재 영미권 록의 화두인 개러지 록에 대한 허클베리핀의 대답이다. 그들은 이 곡을 통해 이들이 한 시대에 머무르지 않고, 동시대의 경향에 나름의 소화력을 갖고 있음을 알려준다. 새로 보강된 키보디스트 루네의 코러스가 이기용의 보컬과 어우러지는 ’내달리는 사람들’, 일렉트로닉 비트를 도입, 그들에게 또 하나의 무기가 생겼음을 보여주는 ’그들이 온다’ 등이 이번 앨범의 주된 색깔을 읽게 하는 곡이다.
<환상...나의 환멸>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지점은 바로 이소영의 보컬이다. <나를 닮은 사내>부터 지금까지 허클베리핀의 목소리를 책임지고 있는 이소영은 지난 앨범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성장을 보이고 있다. 발성과 호흡, 감정표현에 이르기까지 이소영은 이기용이 만든 곡을 누구보다 완벽하게 불러낸다. 분노와 좌절, 허무와 고독, 애수와 희망을 넘나들며 어느 한 곳에서도 허투루지 않은 보컬을 선보이는 이소영은 이번 앨범의 완성도에 있어서 단연 수훈갑을 차지한다. 이제 이기용과 이소영의 투톱 밴드로 완성됐음을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선언한다. 그녀가 한국 여성 록 보컬의 독자적인 지분을 차지하게 됐음을 알리는 인증서이기도 하다.
1996년 결성된 허클베리핀은 10년 넘는 세월동안 이제 겨우 네번 째 앨범을 발매했다. 그만큼 꼼꼼히 자신들의 길을 걸어왔다는 얘기다. 그러나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대중과 타협하지 않고, 보다 높은 음악적 이상을 추구해왔기에 그들이 걸어온 한 걸음, 한 걸음은 탄탄한 반석이 될 수 있었다. 앨범을 발표할 때 마다 자신들의 외연을 넓히되, 그들을 그들답게 하는 ’좋은 음반’에 대한 가치는 포기하지 않았다. <환상...나의 환멸>도 그런 발걸음의 연장선상에 있다. 멈춰서서 만족하는 여행의 종착이 아닌, 끝을 알 수 없는 원정의 비문을 그들은 다시 한번 한국 대중음악계에 아로 새겼다. 어느 때 보다 풍요로웠던, 2007년의 대중음악계에서도 단연 주목할 만한 샛노란 빛이 <환상...나의 환멸>에 번쩍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