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에움길, 본연을 향한 머나먼 여정의 길목에서 들려주는 록의 성가.
이승열 [why we fail]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
그가 돌아왔다. 검으나 맑은 물 천천히 숙성한 것 같은 선율과 목소리로 성실히 세상을 노래하던 그가 돌아왔다. 그악스런 현실을 위악 없는 실눈으로 목도하며 웅숭깊은 기원의 노래를 불러주던 그가 돌아왔다. 헤아려보니 4년 만이다. 무슨 일이 있었나. 유리 같던 그 얼굴, 붉은 기 남지 않을 만큼 오래 돼 시꺼먼 혈흔 가득하다. 세 번째 이정표는 더 이상 기복祈福의 아포리즘을 담고 있지 않다. 그를 기억하고 기대했던 이들은 그가 쓰고 세운 그 이정표를 보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진다. 불혹의 그가 손가락 끊어 쓴 것 같은 한 마디가 하필이면 실패라니. 8년 전 한 해의 끝자락에 서서 ‘이날, 이때, 이즈음에...’라는 첫 번째 이정표를 세우고, ‘삶의 신비는 내가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인 것 같다’는 겸손한 간증과 함께 여행을 시작했던 그가, 여행에 앞서 ‘삶의 진실인 것을 알 수 있게 해준 모든 것. 음악. 그리고 많은 예술적 매개체들에 입 맞추’겠다는 온기 있는 포부를 밝혔던 그가, 그로부터 4년 후, ‘미쳐버릴 듯 빠르게 지나온 시간’ 속에서 ‘여행을 포기했던’ 때도 있었지만, 종래 ‘세상을 맞서는’ 이들을 위한 답례로(In Exchange) 뜨거운 기도의 마디 잊지 않았던 그가, 그랬던 그가 상처투성이의 얼굴로 전하는 말이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라니. 삶의 도저한 비의 속에서 처참한 깨달음 끝에 마침내 투항하기로 한 걸까. 무슨 일이 있었나.
그에게 있었던 일들에 대한 기억
이승열이 자기완결을 향한 길을 느릿하지만 옹골지게 걸어온 음악인이라는데 이의를 표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94년, 방준석과 함께 ‘유앤미블루’로 첫 행보를 내디딘 때부터 그랬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국 모던록의 전설’이란 레토릭은 사실상 분류하기도, 비할 바도 마땅치 않았던 1.5세대 뮤지션들인 그들에 대한 아이러니한 상찬이었다. 애씨드 블루스에 근거한 몽환적으로 어두운 사운드와, 내밀한 자신의 감정을 조용히 회고하듯 들리는 노래가 어딘지 낯설었던 그들의 음악은 당시의 신조류였던 인디음악과도, 구조류(?)였던 언더그라운드의 이른바 ‘가요블루스’와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들이 미학적 접점을 만들길 거부한 적은 물론 없었다. 록의 외피를 두르고 자못 근엄히 위세를 떠는 것으로 쉽게 인증 받으려 했던 일부 가짜 작가들과는 더욱 무관했다. 그들의 관심사는 국제적인 감수성을 음악을 통해 호흡한 경험을 그들의 개인적인 서정과 모국어의 틀 안에 부리는 공정에 있었다. 그 공정은 제 3세계인 한국 대중음악에선 이미 전통이 된 것일진대, 다만 그들이 맞춤할 만한 세대성이 조류나 신scene으로 도드라지지 않았었던 것이 그 전설의 실상이었던 것 같다.
이승열이 단독적인 행보를 시작한 건 유앤미블루가 독존하듯, 컬트적 팬덤을 누리다 긴 휴지기에 들어간 지 무려 7년이 지나서였다. 길지만 뜻있는 휴지기였다. 미묘한 변화, 혹은 알지 못 했던 그의 음악적 층위가 엿보였기 때문이었다. 수줍음 많은 음악청년의 내밀한 정념에 지긋한 감성과 언어가 더해졌다. 기존의 기타 록은 느긋한 포크록과, 영적으로 충만한 파워팝과, 피아노 발라드의 야상곡과 어번 재즈로 지평을 넓혔다. 그리고 그 아래로 세상에 대해 더 조심스러워진 독법이 저류低流처럼 흐르고 있었다. 모던록이라는 국제적 지류를 세련되게 번역해낸 유앤미블루의 성과를 안고서, 이승열은 몇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인디에토스를 잃지 않으면서, 주류와 비주류 모두가 결핍하고 있었던 ‘어덜트’한 록음악의 전경을 제시했다. 아울러, 송라이팅, 프로듀싱, 연주까지 아우르는 원맨밴드의 전방위적 방법론으로 점차 퇴조의 길을 걷던 ‘앨범 록’의 지류에 접근했다.
멸망의 시대, 구원을 찾아 여행을 떠나다.
[why we fail]은 이승열의 세 번째 정규 앨범이다. 앞서 디지털 싱글 형태로 발표했던 "그들의 blues"와 "라디라"가 이젠 익숙해진 두 개의 축을 이루고 있다. “그들의 blues”가 구수하고 천진한 성정의 한대수를 초빙, 경쾌한 루츠 블루스 ‘타령’이었다면, “라디라”는 포크록과 어번 재즈로 빚어낸 성숙하고도 건강한 송가였다. 모두 이승열의 음악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를 다단계적 구조로 응집한 것이었다. 새 앨범의 주요 노선에 대한 예상과 주석이 뒤따랐다. 이승열이 밝아졌다고도 했다. 이제 보니 얼마간은 맞았지만, 전반적으론 틀린 것이었다. 그의 예외적 경쾌함은, 유희적 깨달음은 도저한 어둠과 고통을 배면으로 하고 있었다. 두 싱글은 은근한 반전 혹은 느슨한 맥거핀이었다. 로드무비의 OST인 줄 알았었는데 고행의 일지의 BGM이었다.
이승열 식 ‘실낙失樂의 서곡’인 첫 곡 “why we fail"부터 그 징후는 분명하다. 물 그림처럼 아롱지는 키보드, 단비처럼 내리는 어쿠스틱 기타로 시작해 거라지 록 풍의 거친 사운드로 농도와 강도가 짙어지는 과정은 다양한 모듈이 점진적으로 합쳐져 하나로 꿈틀거리는 이승열 식 음악의 구조의 첫 예시이다. 중량감 묵직한 그의 바리톤 보이스는 ‘상처들’ ‘뒤틀어버리고’처럼 통점 같은 말에서 의도적으로 휘청거린다. 절망에 대한 예고이지만 지레 주저앉진 않는다. ‘쓸데없는 눈물’은 흐르지만 ‘다행인지’ ‘아직은’ ‘따뜻’해서이다.
그는 점멸漸滅이 예정된 세계의 끝에 아직 남아있을지 모를 약속의 땅을 찾아가는 것을 이번 여행, 아니 고행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 출발곡인 ”라디라“가 ‘송가’인 이유이다. 스트레이트한 얼트록alt-rock과 선仙적인 루핑음, 도회적인 재즈로 이어지는 선형적인 구조에서 그는 씁쓸한 듯 성실하게 읊조리고, 서늘한 듯 치열한 팔세토를 끌어올린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건 폐허 앞에서 망연자실해 있는 누군가이다. 그는 다가가 ‘부담 갖지 말길/ 뭘 더 바라지는 않’는다고, ‘편하길 바‘란다고 달랜다. ’라디라‘는 허망을 견디고자 그가 만들어낸 여흥구이다. 몰락 대신 희망을 상상하고, 탄식 대신 노래를 부르기 위한 주문이다.
그에게도 상처가 있었다고 그는 고백한다. 쓸쓸한 어쿠스틱 기타가 오르간과 드럼, 클라리넷, 코러스를 만나 단출하지만 통렬히 아름다운 심포닉 팝으로 확장하는 ”돌아오지 않아(위로)“는 이승열의 회심의 비가悲歌, 애절한 파워팝, 공식적 토치송torch song이다. 떨어져버린 나비, 날개 짓 하다 멈춘 하얀 날개는 아마도 그가 기억하는, 이젠 세상에 없는 누군가이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밤의 폭풍 앞에서 하릴없이 하늘거리던 잎새를 마침내 떨구어 버린 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다. 끔찍한 숙명의 전례 같은 그를 그는 부러 기억하고 언급한다. 그렇게 만든 노래에 ’위로‘라는 부제까지 달았다. 삶과 죽음이라는 끔찍한 자명함을 회피하지도 기만하지도 않겠다는 것인가 보다. 고통을 고통으로 긍정하는 것으로 역능의 에너지를 얻고자 하는 이의 다짐인가 보다. 그 가공적인 성실함이 눈물겹다.
비슷한 음악적 맥락을 취하고 있는 ”솔직히“는 사실 이런 깨달음이 있기 전의 방황을 기록한 일종의 ’프리퀄‘이다. 그는 상실의 예지몽을 꾸었었다(’이미 그런 거면/ 내일 일이‘). 그러나 소통할 길을 알지 못 해 괴로워했었다(’연락 두절로 더 불안한 날들‘). ’세상은 다 타올라버리‘는데 ’달콤한 잠을 자는 사람들‘ 때문에 정작 그는 ’불면의 밤‘을 보냈다. 펜 파이프처럼 황량히 원환을 그리는 음향과, 이승열의 옥타브 화음의 코러스가 고딕적으로 불온하다. 다행히 이는 ”돌아오지 않아“의 증류수 같은 코러스에 귀결하기 위한 불온함이다. ”돈(널 두고 사람들은 뭐라고 하지?)“에서 불거지는 더러운 세상에 대한 증오도 마찬가지로 그 아련히 아름다운 코러스로 걸러질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장 흥겹고 역동적인 얼트록큰롤에 그 증오를 위탁한 모양이다.
피아노 발라드로 식었다가 다시 일렉트릭 싸이키델리아로 뜨거워지는 ”너의 이름“은 증오와 냉소적 역설을 극복한 후의 눈물처럼 들린다. ‘이곳에서 축복이란 오래 참는 마음이겠지/ 울면서 노래하는 간절함이여’라며 목소리를 벼리는 대목은 복음에 실패한 선지자가 세속에 내려 서 몸을 섞는 것으로 더 깊은 사랑을 얻겠다, 울며 맹세하는 것 같다. 기타와 피아노가 긋는 선線의 음악에서 안개처럼 음이 번지는 기氣의 음악으로 변하는 엠비언트 팝 ”또 다시“에서 그는 종교적 의미의 원초적 자아를 회복한다. 암전된 수용성의 공간을 아련히 명멸하며 유영하는 기타 록인 ”나 가네“에선 그렇게 회복한 자아로 여전히 만만찮은 세상에 다시 나갈 각오를 한다. 흐느끼는 팔세토가 이승열 식 엠비언트 소울, 혹은 포스트 록 성가를 들려준다. 실연의 고통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말자는 내용의 드림팝 ”lola"와 “기다림의 끝”, 재즈의 어법을 빈 판소리(!) ”D. 머신“을 지나면 경쾌한 반전처럼 ”그들을 위한 blues"가 들어선다. 삶의 덧없음을 해학으로 표현할 만큼 넉넉해진 경지를 보여주며 그의 헌신적인 고행도 끝이 난다. 싸이키델릭 카오스가 고행의 반복을 암시하는 히든트랙 “그가 맘에 들어오면”을 여운처럼 남긴 채.
구도의 록: 세속적 성가 혹은 성스러운 유행가
[why we fail]은 이제까지의 이승열 디스코그래피의 고개넘이이다. 싱어송라이터이자 원맨밴드, 또 셀프 프로듀서로서 그의 8년간 궤적과 내력을 가장 탁월하게 양각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원히트 싱글’보다는 앨범의 ‘구조’에 천착해 온 ‘앨범 록 뮤지션’으로서의 역량을 가장 매혹적으로 주조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블루스, 루츠, 싸이키델릭 록, 포스트 록, 드림팝, 재즈 등의 다양한 요소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으로 구조미를, 단단하고 아름다운 멜로디 마디들로 개별적 재미를 꾀하는 것으로 그 사상 가장 완성도 높은 송라이팅의 경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한 마디로 [why we fail]은 이승열이 이제까지 선보인 것 중 가장 프로페셔널하고 성숙한 앨범이다. 그리고 내향적이고 관념적이었던 독백이 현실과 세계를 포용하면서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화법을 보여주기 시작한 본격적인 앨범이다. 너를 호명할 때조차 사실은 2인칭화한 자신에게 말을 거는 듯 들렸던 그는 이제 ‘우리we’라는 동류의식을 통해 기꺼이 스스로를 타자들 속에 부대껴 넣고 있다. 이와 함께 그의 페르소나도 분명해진다. 그것은 구도자의 페르소나이다. [why we fail]의 여정 내내 산상수훈을 읽었고, 멸망을 생각했고, 생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부박한 인간들을 이해했고, 말을 걸고 싶었다는 그다. 그런 아픈 모색의 결과물인 이 앨범에서 그는 가장 순정하고도 구체적인 운과 율로 그들을 치유와 성찰의 길로 안내하고 있다. 그를 통해 종래 자기 자신의 구원을 모색한다. 성공은 성격을 형성하고, 실패는 성격을 드러낸다는 말이 있다. 전자가 완결적이나 가공적이라면 후자는 폭로적이나 근본적이다. 실패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실패야말로 군더더기 없는 ‘자기’를 드러내거나, 혹은 작위가 붙기 전의 자기로 초기화하는 가장 강력한 동인이라는 것을. 이승열이 말하는 실패의 이유는 사실 실패의 ‘존재근거’일지도 모른다. 불화와 환멸, 궁핍과 처참, 재앙과 전락으로 자욱한 세상을 변증법적으로 긍정하는 출발점으로서. 그가 마침내 당도한 이 참혹히 아름다운 땅에 함께 발을 들여 보자. 바다 같은 눈물 끝에 쥐게 될 한 줌의 웃음을 꿈꾸며.
- 글: 최세희 (음악칼럼니스트, 번역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