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는 사람의 노래 : 조동익 2집 [푸른 베개]
노란 대문 집은 정릉 배밭골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제주의 산 중턱에도 노란 대문 집이 있다. 바다는 멀고바람은 가깝지만 깊은 밤 그곳에서는 바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오래된 라디오의 다이얼을 돌려 주파수를 맞추듯이 지직거리며 맞춰지는 먼 소리는 더욱 먼 소리와 대화를 시작한다. 거기에는 오래도록 기억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
기억하는 일은 꿈을 꾸는 일, 잠이 드는 일, 잠 속에 비로소 날개를 펴는 일이다. 명랑한 참새도, 늘씬한 제비도 아닐 것이다. 몸보다 긴 날개를 가진 알바트로스일지 모르겠다. 거대한 새는 하늘을 이불 삼아, 바다를 베개 삼아 어떤 꿈으로 날아간다. 그곳은 애월의 바다였으면 한다. 해수욕을 즐기는 그림 같은 백사장보다 바람과 구름과 사나운 물결과 사라져 가는 해가 보이는 곳이었으면 한다. 사라져 간 이들을 떠올리기에 적당한 곳이었으면 한다. 누군가가 나타났던가, 그러다 사라졌던가.
가까이서 들리는 소음들. 여닫는 문소리, 개수대의 물소리, 조용한 발소리. 정원의 무성한 풀들 사이 들꽃을 꺾어 꽃병에 꽂아 두는 일. 내 안의 소용돌이를 다독이는 일.
오래전, 어린 딸을 위해 노래를 들려주었듯, 이제는 다 자란 딸의 갓난아기를 위해 노래를 들려준다. 노래는 더욱 낮은 곳으로 가라앉아 아기를 가만히 쓰다듬는다. 아기가 스르르 잠이 들면 그 곁에 함께 꿈속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아기의 엄마가 있다. 아기를 위한 노래는 아기의 엄마를 위한 노래가 되고 또 나의엄마를 위한 노래가 된다.
겨울의 끝자락에 내리는 빗소리는 겨울비와 함께 떠나간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돋운다. 엄마와 성당에 가서 보았던 첨탑과 걸인, 노래 소리들을 기억한다. 거울 속에 떠나지 않은 그가 있다. 나와 동행하는 그가있다. 비가 떠오르게 하는 기억들이 있다. 비는 때때로 누군가를 기억하라 일깨우는 작은 의식이 된다.
바람이 노래하게 하는 것들. 창가에 걸어둔 풍경이 뒤척인다. 어떤 장면들이 뒤척인다. 찬란하던 시절들이뒤척인다. 젊음이 아름다운 시절인 것은 연기처럼 사라지기 때문이다. 넘치게 가득 채웠나 싶다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사라진 사람들의 기억. 결코 사라지지 않을 기억을 되새긴다. 어리고 가난하던 시절, 젊고 가난하던 작은형과 형수가 보여준 환대, 촛불 아래 노래를 만들던 작은형의 그림자, 장을 보아 돌아오던 형수의 머리칼, 잊지 않고 어린 나에게 사다주던 줄줄이 사탕, 사라진 곳, 사라진 시절, 사라진 이들. 기억이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간다. 나는 남겨졌다.
잠시 멈춘 순간, 버려진 듯 혼자가 되어 사라진 것들을 생각하면 신기루 같다. 언젠가 내가 있는 곳이 끝없는 사막이라 느꼈었던 그때처럼, 혼자가 된 순간 내 앞엔 신기루가 있다. 허공을 채우는 고요에 귀를 기울인다. 틈을 가르는 소리, 미세한 기척이 환영처럼 지난다. 무엇을 위해 쉼 없이 달렸을까. 깊은 한숨과도 같은 낮은 음의 현. 내가 날았던 바다의 선명한 기억은 무엇이었을까. 나의 날개는 어디에서 잃어버렸을까. 은빛 나무들의 노래,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이토록 선명한 그리움은 어찌하는가. 소금처럼 모두 녹아 사라지기를 바란다. 희망도, 상처도, 열정도, 분노도.
숲에 부는 바람 소리가 만들어 내는 화음, 겹겹이 잎새를 지나는 투명하고 높은 음과 흙을 밟고 지나는 묵직하고 낮은 음은 사라진 것들이 영영 사라지지 않고 남긴 기억을 어루만진다. 가만히 쓰다듬는 부드러운자장가는 연기를, 구름을, 꿈을 옹호한다. 열두 곡의 노래는 사실 하나의 긴 노래였다. 미끄러지듯 소리는조금씩 겹쳐지고 조금씩 나아간다. 평안을 다독이는 자장가는 기억에만 남겨진 사라진 것들을 다독인다.남겨진 사람을 어루만진다. 기억하는 사람을 쓰다듬는다. 하나의 긴 애도의 노래를 들었다.
- 신영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