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으로 부르는 노래'
통기타 하나 달랑 메고 본격적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지 열다섯 해가 된다는 이성원씨. 화려한 스포트 라이트를 받는 가수는 아니지만 우연히라도 그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발길을 멈추게 된다고 한다. 그의 노래에는 어떤 힘이 있을까?
보기 드문 노래꾼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굳은 땅을 촉촉하게 적시는 빗줄기 같은 노래를 하는 사람이려고 했다. 봄이면 도시 전체가 꽃등을 켜고 하얗게 손짓하는 남해안의 小도시 진해 꽃을 보기에는 이른 철에 그를 만나러 갔다. "벚꽃이나 향어회를 빼고도 억수로 아름다운 도시"라고 농을 하는 목소리가 정겨웠고, 마음에서부터 풀어낸다는 그의 노래를 청해 들을 욕심에 먼 여행길도 신바람났다.
통기타 하나 달랑 메고 본격적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지 열 다섯 해가 난다는 이성원씨(37). 그는 오빠 부대를 동원하는 가수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가수도 아니다. 그를 좋아하고 기억하는 사람들은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그의 노래를 우연히 듣고 저도 모르게 가던 길을 멈춰서게 되었다고 말한다. 짧은 순간 반짝 빛을 발하고 스러지는 '스타'들과 새로운 노래가 헤아릴 새도 없이 쏟아지는 요즘. 그의 노래가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힘은 무얼까.
명상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노랫말
대중가요가 명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면 어떤 노래인지 쉽게 상상할 수 있을까. 그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성원의 노래는 명상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의 노래가 사람을 사로잡는 힘은 바로 그것이라며, 그에게 물으니 세상이 워낙 명상적이지 않아서 그렇게 들릴 뿐이라며 별 다른 답이 없다. 오히려 "그런데 명상이 뭐예요?"라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되묻는다.
그의 노래는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도레미파솔라시의 각 음들이 꼭 제 집을 찾아들어간 것처럼 여기저기 잇대어 짜집기한 느낌이 없다. 그는 '명상적'이라는 의미를 나무들이 꾸밈없이 제가 자라고 싶은 방향대로 가지를 뻗는 것에 비유했다. 그것처럼 그의 노래 대부분이 어느 순간 한 소절이 풀려나오기 시작하길래 줄줄 뽑아냈더니 곡 하나가 완성되었다는 식이다. 곡을 만드는 동안 수정하는 일 없이 기타를 퉁기며 나직이 읊는 것만으로 노래가 된다.
어느 여름, 저녁 어스름에 산택을 나갔다가 해가 지고서야 집으로 돌아올 때였다. 언덕받이의 계단을 오르며 하늘을 보니 별이 초롱했다. 넋을 잃고 올려다본 별이 뱅글 맴을 돌자 그도 따라 돌았다. 순간 그는 계단에서 쿵 하고 떨어지고 말았다. 그 후유증으로 보름쯤 의식을 잃고 누웠다가 깨어난 날이었다.
"내 속에서 뭔가 우우우 하고 올라오는 게 느껴졌어요. 그러더니 멜로디가 되고 노랫말이 되었어요. 녹음기를 부둥켜안고 흘러나오는 대로 불렀지요."
<선인장을 보러>가 이 때 만들어진 곡이다. <비가 내린다>도 마찬가지다. 어느 소나무숲에서 기타를 퉁기고 있는데 갑자기 후두둑 후두둑 빗방울 드드는 소리가 들렸다. 비를 피할 생각도 않고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를을 읊다가 노래가 되었다. <비가 내랜다>에서 그는 "내 영혼 속에 터질 듯이 쌓이고 쌓인 말들처럼/내 영혼 속에 쏟아져오는 그 많고 많은 예감처럼" 비가 내린다고 했다. 그의 노래도 꼭 그렇게 터져나온다.
그는 지금가지 노래를 만들면서 오선지나 펜을 사용해본 적이 없다. 15년 경력의 가수답지 않게 악보를 그리는 데 서툴기도 하지만 흘러나오는 대로 불러보는 순간 그대로 머릿 속에 각인된다고 한다.
그의 노래가 명성적인 더 큰 이유는 노랫말에 있다. 그의 노랫말은 주절주절 흘러나오는 대로 붙인 것처럼 평범한 듯하면서도 담다른 깊이가 느껴진다. 듣기에 따라서는 무심히 흘러보낼 수도 있는가 하면 박하사탕을 삼긴 듯 답답했던 가슴 속을 '싸아' 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 그래 가자/이 길 따라 가자/술렁대는 세상/눈을
반쯤 감고/가다 보면 행여/새벽 아침을 볼까/기다리는
마음/달래면서 가지
<그래 그래>에서 그는 고단한 삶의 여정에 나선 사람들에게 술렁이는 세상 일일랑 한쪽 눈을 질끈 감고 그렇게 걸어가자고 노래한다.
나무 밭에서 익은 잎사귀 푸르고/구름 밭에서 열린 비
내린다/나무 밭은 땅에 심겼는데/땅은 어데서 심겼나/
그름 밭은 하늘에 걸렸는데/하늘은 어데서 걸렸나
그의 2집 음반 타이틀 곡인 <밭>이다. 존재의 궁극적인 근원을 묻는 노랫말이 그 뜻을 알 듯 모를 듯하다. 이 노랫말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녹음을 끝내고 심의를 받는 과정에서 그만 음반 심의에 덜컥 걸리고 말았다. <밭>을 포함한 2집의 가사들이 대체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장 아끼는 것은 바로 이 말도 안되는(?) 노랫말이다.
노래의 참 임자는 '느끼는' 사람
누구에게나 어려운 시절은 있는 법이다. 그 어려움을 잊을 만큼 빠져들 수 있는 무언가를 찾은 사람은 행복하다. 그에게는 노래가 그랬다. 부친이 일찍 별세하시는 바람에 그는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공납금을 제 때 내지 못해 정학을 당하고 겨울이면 몇 개월치씩 밀린 방세 때문에 쫒겨나 리어카를 끌고 이집 저집을 기웃거리던 기억이 어둡지만은 않은 것은 노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래에 미치지 않았다면 견디기 어려웠을 세월이다.
굳이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고교 졸업 후 거친 직업만도 서너 가지가 된다. 볼링장에서 '핀보이'를 하기도 했고, 가구점에서 가구를 배달하는 일도 해보았다. 우유 배달을 한 적도 있었는데 시작한 지 석 달 만에 오히려 돈을 물어넣어야 할 판이었다.
"어머니 친구분이 지나간다고 우유 한 병 드리고, 알고 지내는 형이 배가 불러오는 형수랑 지나가면 우유 두 병 드리고···. 뭐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오히려 적자가 나던 걸요."
그는 지금도 노래를 직업으로 하고 싶지는 않다 .스스로를 굳이 '가수'보다는 '노래사람'으로 불리기를 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생활이, 삶이 없으면 노래는 없어요. 내가 생각하는 진짜 노래사람은 밭을 갈거나 외양간을 고치는 등 열심히 하루를 살고 난 저녁에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과 만족을 노래하는 그런 모습이예요."
그는 트로트, 포크, 락, 발라드, 팝송, 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가창력을 구사한다. 뿐만 아니라 굳이 자신이 만든 노래만을 부르지도 않는다. 오히려 알려지지 않은 곱고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일에 더 열심이다.
최근 내놓은 동요를 모은 음반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도 그렇다. 이 음반에는 '나뭇잎배', '구두 발자국', '섬집아기' 등 작은 시골학교의 어여쁜 여선생님과 낡은 풍금소리와 검정 고무신을 가슴 한 켠에 묻어두고 훌쩍 세월을 넘겨버린 어른들을 위한 동요를 모았다.
누가 "당신 노래를 좀 불러보라"고 하면 그는 "내가 부르는 노래는 다 내 노래"라고 답해준다. 그래서 자기 노래를 부르더라도 "내가 작사, 작곡한 노래"라고 말하기가 어색하다.
"내 노래, 남의 노래가 어디 있겠어요. 부르는 사람의 노래고 듣는 사람의 노래죠."
그는 노래 자체보다 노래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가슴이 동시에 올리는 그 순간의 공명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음반 만드는 일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라이브 공연을 좋아하는 가수들이 그렇듯이 테잎으로, 판으로 듣는 노래는 이미 새장 안에 갇힌 새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같은 노래란 없다. 같은 노래라도 부르는 이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며, 같은 사람이 같은 노래를 부르더라도 노래하는 순간순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떤 노래는 참 임자는 그 노래를 온전히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느 현대 음악가는 "이제 음악에 있어 중요한 것은 도나 미가 어디에 놓일 것인가가가 아니라 그것이 내는 진동, 음향, 파장"이라고 했다. 그의 노래가 아주 특별한 장르가 아님에도 남다른 매력을 뿜어내는 것도 그의 노래만이 갖는 독특한 '파장' 때문이다 음정, 박자가 맞지 않아 들쭉날쭉한 얼니 아이의 노래가 어떤 음악보다 아름다운 것은 천진난만함 때문이다.
그는 맑다. 순탄하지 못한 세상살이를 헤쳐온 삼십대의 모습이 저럴 수도 있구나 싶도록 오랫동안 그를 알고 지내온 어떤 이는 그를 두고 '별에서 온 사람'이라고 우스겟소리를 하기도 한다.
그는 지금까지 두 장의 음반을 냈다. 1집 <문을 열고 나서니>외 2집 <나무 밭에서>가 그것이다. 모레코드사에서 1집을 만들었을 때 그는 주목받는 신인이었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도 그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1집이 사람들의 귀에 체 익기도 전에 묻혀버리고 만 데는 사연이 있다. 레코드사 사장과 함께 방송국 프로듀서를 만나러 간 자리에서 돈봉투가 오가는 것을 보고 그가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린 것이다.
"그건 가짜지요. 나는 사람들이 듣고 정말 좋아서 찾는 노래를 원합니다."
2집 음반이 나왔을 대도 비슷하다. "누가 누구를 스타로 키울 수 있다"는 힘(?)의 논리 앞에 나이도 인격도 무시되는 방송가의 생리가 싫었다. 주위 사람들은 이런 그를 세상 물정 모른다고 면박을 주었지만 그는 여전히 '가짜'를 용납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 그럴 때마다 그는 웃으며 말한다.
"그래서 내 주머니는 빈 주머니, 그러나 내 마음은 가득."
잊을 수 없는 '소 머리의 물결'
그에게는 평생에 잊지 못할 두 가지의 '물결'이 있다. 그 하나는 '소 머리의 물결'이고 나머지 하나는 '사람 머리의 물결'이다.
평택에 있는 친구를 찾아갔을 대였다. 새벽에 일어나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논두렁을 따라 산책을 나셨다. 얼마쯤 걸어 나갔더니 목장이 보였다. 울타리 안에 이삼백 마리의 소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있었다. 선하고 맑은 소들의 눈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갑자기 소의 뿔을 만져보고 싶어져서 손을 내밀었지만 달아날 뿐 가까이 오려들지를 않았다. 발걸음을 돌리다가 그냥 오기가 아쉬워 노래라도 한 곡 불러주자고 생각했다. 그는 소들을 위해 즉흥적으로 모음母音으로만 이루어진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제각각이던 소들이 노랫소리를 따라 전부 저를 향해 몰려들었어요. 뿔을 들이대고 혓바닥을 내밀고 야단이 났어요. 난생 처음으로 소들을 마음껏 쓰다듬고 껴안아 봤어요."
노래를 부르는 순간 일제히 그를 향하던 수백 마리 소들의 머리가 이루는 물결, 그 때 일은 지금 생각해도 벅찬 감격이다.
두 번째는 인도의 라즈니쉬 아쉬람에서였다. 천 명 가까운 산아신(라즈니쉬의 제자를 이렇게 부른다.)들이 큰 강당에 모여 하얀 색 로브를 입고 흔들흔들 자유롭게 움직이며 춤추고 있었다. 아쉬람에서 갖는 '춤의 명상' 시간이다. 그는 각국의 뮤지션들과 함께 무대 옆에서 한 가지 주제로 즉흥음악을 연주했다. 느리게 시작된 음악이 점점 고조됨에 따라 춤추는 이들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그러다가 한 순간 그대로 정지하는 식이다. 이 때 그가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정면을 향하고 있던 사람들이 파도치듯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마치 벼이삭들이 바람에 몸을 맡겨 굽이치는 것처럼 장관을 이루었다.
즉흥음악은 대부분의 뮤지션들이 동경하는, 음악인으로서 나름대로 경지에 오른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음악이라고 평론가들은 말한다. 음악인의 내면이 순간에 몰입할 줄 아는 끼와 영감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음악은 즉흥적이다. 그가 만든 곡들이 대부분 그러할 뿐 아니라 라즈니쉬 아쉬람에서처럼 무용 공연의 배경음악을 즉흥적으로 시도했던 적도 있다. 낙태 반대를 주제로 한 <어린 영혼의 비나리>라는 무용 작품에서 그는 30분 가량의 공연 시간 동안 무대 뒤에서 아무런 악기도 사용하지 않고 구음口音으로만 배경음악을 담당했다. 공연을 지켜보았던 한 무용평론가는, "춤 자체보다 배경음악을 담당한 가수의 소리가 더 인상적이었다.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고 평했다. 보이지 않는 목소리의 주인공인 그가 공연이 끝난 뒤 무대에 올랐을 때 관중석에서는 기립박수가 터져나왔다. 그는 의병장 최익현을 기린 국수호씨의 작품 '면암의 명상'에서도 같은 작업을 해 박수 갈채를 받았다.
그에게 즉흥음악은 어떻게 하는 지 물었다.
"그냥···던지면 돼요. 도를 소리낼지 미를 소리낼지 생각하는 순간 소리는 멈춰지고 맙니다. 소리가 저절로 내 몸을 타고 나오도록 해야죠. 주제에 깊이 몰입하면서 나는 그냥 입을 벌리기만 하면 됩니다. 내가 뭔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제에 뜻을 두고 던지면 저절로 소리가 되는 거지요."
이런 작업을 할 경우 연습은 없다. 주제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으로 모든 준비는 끝난다. 그 시간이 5분에 지나지 않을 지라도. 그는 음악 활동을 하면서 철저하게 '연습 안 하기'를 고수한다.
"연습을 하면 할수록 노래가 그냥 묻혀 버린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나는 내가... 샘이기를 바랍니다. 굳이 땅을 파지 않더라도 늘 솟아나와 넘쳐 흐르는 그런 샘이요."
좋은 노래, 감동을 주는 노래를 위해서는 물론 피나는 수련도 필요하다. 그는 반복되는 연습을 통해 순간순간의 살아 있는 느낌들이 노래를 통해 피어나지 못하고 화석처럼 굳어버리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샘이 되려면 물이 차오를 비어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의 '연습 안 하기'는 그런 의미다.
그는 즉흥음악에 남다른 매력을 느낀다. 아무런 제약이 없이 주어진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다는 것. 얼마나 황홀한가. 그는 이십대를 어디서부터 오는지 알 수 없는, 충만한 음악적 영감에 휩싸인 채 보냈다. 나뭇잎에 부서져내리는 햇살. 코끝을 간지르는 꽃내음. 빈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꼬맹이들의 환호성···. 그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하나의 곡조로 피어나곤 했다.
발 끝에 그는 "지금은 삼십대라서 못하지요."라고 덧붙였다. 그 말에서 산과 들에서 뜻대로 자라는 나무를 옮겨다 굳이 분제를 만들고마는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응답하는 노래를 부르고 싶다.
그는 최근 일본 공연을 다녀왔다. 그가 하고 싶은 일 중 한 가지가 '고리타분하다'는 틀 속에 갇혀버린 우리 가락을 대중화하는 일이다. 굿거리, 중모리, 휘모리 등의 우리 가락을 고고, 디스코, 블루스 같은 서양리듬 못지 않게 세계적으로 유행시키고 싶다.
그가 우리 가락에 관심을 가져온 지는 십 년쯤 된다. 양희은, 송창식, 김민기 등 칠십년대를 풍미한 포크 가수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그는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포크로 시작했다.
"포크라는 말에 '민속'이라는 의미가 있잖아요. 포크 음악을 단순히 통기타 음악이라고만 생각하니까 어느 날 거기에 생각이 미쳤어요. 어 그러면 우리 민속은, 우리 것은, 우리 노래는? 그렇게 된 거죠."
1집이 포크락 위주의 곡들인 데 비해 2집에서는 포크락적인 곡과 <보아라 수야>, <구름타령>, <상주 모십기> 등 우리 가락의 느낌을 살린 곡들을 가미했다.
우리 가락이나 악기에 대한 감각을 키우는 데 있어서도 그는 지도를 받은 적이 없다.
"다른 사람한테 배우기보다 내 안에 있는 걸 찾고 싶었어요. 내가 한국인인 이상 우리 가락이나 장단에 대한 감각이 당연히 내 속에 녹아 있겠죠. 누군가에게 배우면 자칫 앵무새가 되지 않을까 두렵기도 했어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내 안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탄광에서 금을 캐내는 광부가 되기로 했지요."
그는 요즘 몇몇 관심 있는 사람들에 의해 사물놀이가 되살아나고 있지만 우리의 풍물은 그렇게 기계화된 장단이 아니라고 말한다.
"진해에서는 군항제가 열리면 언제나 풍물패가 풍물을 놀았어요. 어려서부터 그 장단에 익숙했죠. 우리 풍물은 기계화되고 정형화된 가락이 아닙니다.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아도 당겨주고 밀어주면서 서로 어울렁 다울렁 맞물려 넘어가는 그런 맛이 진짜예요."
그가 되살려내고 싶은 우리 가락은 그런 것이다.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어울리는 것.
그는 현재 창원, 진해, 마산 일대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제일 심혈을 기울이는 일은 우리 아이들에게 밝고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는 일이다. 아이들의 정서를 망가뜨리는 쪽으로 흐르고 있는 대중매체에 반기를 들고 잠자는 순수와 감성을 일개우는 이 일을 그는 '아름다운 싸움'이라고 표현한다. 청소년음악회 등 청소년들을 위한 프로그램들을 직접 기획하고 진행하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다.
어떤 노래를 부르고 싶냐고 물었더니 "응답하는 노래"라고 했다 무슨 뜻인지 얼른 알아듣지 못해 주석을 부탁했다.
"진실로 노래를 하면 답이 와요. 세상에는 많은 소망이 있지요. 내 개인이 원하는 것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함께 원하는 소망도 있잖아요. 나는 그 소망을 노래하면 되는 거예요. 밝고 경쾌한 노래가 세상에 넘치면. 그리고 진실로 노래를 하면 그런 세상이 돼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 뿐입니다."
그가 먼 길을 찾아 온 손님을 위해 마지막으로 불러준 노래는 이랬다.
사랑하는 사람들아/나 초저녁 별이 되니/내 영혼 쉴 때까지
/내 소망을 노래하리
글 : 강정화 (자유기고가)
찾아가는 동요콘서트 이성원씨 <국민일보 최현수기자 hschoi@kmib.co.kr>
“아이들에게 풍경을 전해주고 싶어요.이제는 다시 찾을 수 없는 우리의 풍경말입니다”
낡은 통기타줄을 튕기며 한 소절,두 소절 상큼한 노랫말을 이어가는 이성원씨(42)는 초등학교를 찾아다니며 동요콘서트를 열고 있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그는 때로는 자기 돈을 들여,때로는 차비도 안되는 적은 사례비를 받고 강원도 깊은 산골에 있는 작은 초등학교라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간다.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잃어버린 우리의 서정을 영영 되찾지 못할 것 같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지난 3월부터 그가 찾아다닌 곳은 전교생이 67명밖에 안되는 시골학교인 강원도 정선 용탄초등학교와 경남 하동 악양초등학교,서울 쌍문동 한신초등학교 등 벌써 10여곳이 넘는다.
힘차게 태양이 솟구쳐도,탐스러운 달이 둥실 떠올라도 촘촘히 들어선 고층건물에 모두 가려져버리는 삭막한 도시.그 속에 사는 우리 아이들이 나이에 걸맞지 않은 노래들을 먼저 배우는 것이 그를 못내 괴롭혔다.요즘 유행하는 노래들은 그에게는 노래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참 노래를 돌려달라고 외쳐대는 아우성같이 들리기 때문이다.그는 “아이들이 이상하고 쓸데없는 노래나 부른다고 야단치지만 사실 어른들이 아무 것도 전해주지 않기에 그런 노래들에 빠져버린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동요를 불러줄 때면 그는 아이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해지면서 어린 가슴 깊숙이에서 메말라있던 그 무엇인가가 촉촉히 적셔지는 것을 보게 된다.
산골에 살고 있는 아이들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동요에 대해 깊이 배울 기회가 별로 없어도 자연과 부대끼면서 체득한 정서가 아직은 살아있다.지난달 30일 강원도 영월 구래초등학교를 찾았을 때다.50명이 채 되지 않는 전교생이 모여 이씨의 노래를 듣더니 자신들도 노래를 선물하고 싶다며 민요를 불러줬다.아이들의 민요자락에는 자연에 대한 따뜻한 정과 풋풋한 감성이 배어있었다.
도시의 아이들이라고 동요의 힘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단지 맛볼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올 2월이었다.이씨는 두번째 동요집을 낸 뒤 음반제작을 도왔던 이재만 선생님(경기도 일산 고양종합고등학교)의 요청을 받아 고양종고에서 동요공연을 가졌다.다른 교사들은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동요가 통하겠어?요즘 아이들이 어떤데”라며 고개를 저었다.그러나 처음에는 하품을 하며 지루해하던 학생들이 시간이 조금 지나자 진지한 표정으로 동요를 듣고 따라하는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동요의 힘이요?” 이씨는 “흩어졌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동요의 힘”이라고 잘라말한다.동요는 세대를 초월한 우리 모두의 노래이기 때문이다.“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복된 소리,곧 생명을 살리는 소리가 아니겠어요.동요는 아이들의 영혼을 살리는 복음입니다”
두장의 음반녹음을 끝낸 올 3월부터 시골 초등학교를 방문해 동요를 부르고 가르치는 ‘찾아가는 동요콘서트’를 열었다.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했던 그는 고교 3학년때 처음으로 통기타를 치기 시작한 뒤 이제까지 한 번도 기타를 놓지 않았다.어려운 가정형편때문에 대학진학을 포기한 그는 잠시 취직을 했지만 일하는 시간에도 노래연습을 해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그후 고향인 경남 진해를 떠나 마산과 부산,서울의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를 불렀다.
노래만으로는 생활을 해나가기 어려워 가구배달,우유배달까지 해야했다.그러나 노래를 멈출 수는 없었다.서울 크리스탈 문화센터에서 ‘이성원-수요콘서트’도 열고,무용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하기도 했다. 1987년 첫 음반 ‘문을 열고 나서니’를 냈다.토속적인 질감과 서구적 세련됨이 절묘하게 섞인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큰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92년 자작음반 2집 ‘나무밑에서’를 출시했다.역시 관심을 보인 곳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노래를 부를 때면 늘 동요를 한 곡 부르고 시작했던 그에게 사람들은 “성원씨가 부르는 동요,참 따뜻하네”라며 호응을 보였다.특히 아이들의 반응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한 두 번 참여했던 어린이들을 위한 공연에서 그는 아이들이 동요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현란한 대중가수들의 움직임과 빠른 리듬에 푹 빠져있던 아이들이 처음에는 단조로운 리듬이 반복되는 조용한 동요를 듣고는 심심해했다.그러나 조금 시간이 흐르면 아이들은 마음속에 뭔가 꼼틀거리는 듯 이내 따라한다. 자신들에게 꼭 맞는 노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는 듯 얼굴에는 빙긋빙긋 웃음이 번져가기도 한다.이런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도대체 무얼 전해주고 있는 걸까.우선 어른들부터 옛 정서를 되찾아야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온 것이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이성원이 노래하는 어른들을 위한 옛동요’라는 부제가 붙은 이 음반에 그는 ‘겨울나무’ ‘엄마야 누나야’ ‘구두발자국’ 등 8곡을 담았다.이 음반을 만들때 초등학교 아이들의 도움을 받았다.춘천에서도 한참 들어가는 깊은 산골에 있는 추곡초등학교 학생들이 이 음반의 첫 곡과 마지막 곡을 불러줬다.한 학년이라야 고작 서너명.전교생이 스물아홉명에 불과한 작은 학교.시를 쓰는 교감선생님의 협조로 아이들의 때묻지 않은 소리를 실을 수 있었다.여린 봄햇살이 수줍게 찾아든 교실 한 켠에 녹음장비를 설치하고 지도교사에게 시작 신호를 보내자 교사의 풍금소리에 이어 번지는 ‘따옥 따옥 따오기 논에서 울고…’.아이들의 목소리에 실린 너무도 귀에 익은 화음을 타고 다가오는 어린 시절의 추억에 녹음하던 이들은 순간 핑그르 도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것을 잃고 산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성원씨의 동요와 또 추곡초등학교 아이들의 노래는 도심의 회색 정글에서 쫓기듯 살아온 날들이지만 아직도 우리의 마음 한구석에 화석처럼 남아있는 아름다운 기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이씨의 첫 동요음반제작을 도왔던 음악평론가 김진묵씨의 말이다.
첫 동요음반을 낸 뒤 그는 열린음악회,국악한마당 등에 출연하고 동요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기도 했지만 그곳이 자신이 설 자리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올 2월 환경의 소중함을 일러주는 국악집 ‘동쪽산에’와 두번째 동요음반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를 출반한 뒤 홀가분한 마음으로 ‘찾아가는 동요콘서트’를 시작했다.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정다운 마을의 한 전셋집에 아내,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인 딸과 살고 있는 이씨는 “목소리가 나오는 한 계속해야지요.할아버지가 돼도 불러주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가서 동요를 부를거예요”라며 소박한 웃음을 지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