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개성시의 가난한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사망년대와 학력은 알수 없고 어려서부터 연극에 출연하였다고 한다.
그는 9살때부터 연극에 출연하면서 독학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12살때에 고향인 개성으로 돌아와 검정시험으로 보통학교의 졸업증을 받았다고 한다.
암기력이 비상하여 자기의 역할에 맡겨진 대사들은 한 두 번 읽고 모두 암송하였다고 한다.
천성적으로 배우의 기질을 타고난 이애리수는 1923년경에 김소랑이 이끄는 극단 취성좌에서 소녀역으로 출연 하다가 연극 《시들은 방초》에서 연기실력을 발휘하여 수많은 관객들을 울렸다.
그는 1927년에 연극 《유랑의 남녀》를 공연하는 과정에 막간을 이용하여 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인 《황성옛터》를 불러 관객들의 심금을 울려주곤 하였다.
이때부터 명배우, 명가수로 널리 알려지게 된 이애리수는 다른 노래들도 다 잘 불렀지만 《황성옛터》는 특별히 잘 불렀다.
나라를 잃은 망국의 설음이 그의 가슴속에 슴배여있고 그 감정을 절절하게 노래의 선율에 태웠기때문이다.
그때로부터 몇해가 지나 1930년대초에 이르러 그는 《황성옛터》를 《빅타》레코드에 취입하여 이 노래가 전국적판도로 급격히 류행되였다.
레코드에 취입된 곡명은 거치른 성의 발자취란 의미에서 《황성의 적(荒城의 跡)》이라고 하였다가 후에 《황성옛터》로 고쳤다.
그는 이 노래의 취입에 앞서 《콜럼비아》레코드에 《부활》, 《베니스의 노래》, 《라인강》 등을 취입하였고 《빅타》레코드에 《사양의 비도》, 《님이 그리워 타는 가슴》, 《님맞이 가자》, 《이국의 하늘》 등을 취입하였다.
그후 그는 가정에 은퇴하게 되면서 노래를 취입하지 않았다.
그가 가정에 은퇴하게 된데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아래에 그 이야기를 추려본다.
1930년대초에 이르러 그는 연희전문학교의 졸업반인 배동필이란 학생을 사랑하고있었다.
그러나 시부모가 되여야 할 배동필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를 한사코 반대하여 나섰다.
그 이유는 첫째로 배우라는것은 조선시대의 광대와도 같은 천한 신분이라는것, 둘째로 여자배우는 기생과도 같이 방종하고 방탕할수 있다는것, 셋째로 여성다운 예절이 있을수 없고 가정을 착실히 꾸려나갈수 없다는것, 넷째로 박수갈채속에서만 살았기때문에 자존심이 강해서 시집살이를 할수 없고 가정살림을 제대로 꾸려나갈수 없다는것이였다.
이렇게 되여 이애리수는 애인의 행복과 앞날의 축복을 빌면서 자신은 자살의 길을 택하리라 결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였다. 그의 애인 배동필은 부모들이 한사코 반대한다면 집을 탈출하여 이애리수와 가정을 이루리라 결심하였다.
그는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있는 이애리수에게 자신의 결심을 터놓기 위하여 그의 숙소를 찾아갔다. 그러나 이애리수는 절대로 방안에 들어오지 말라는것이였다. 그러면서 이애리수는 사발에다 독약을 풀어 마시는것이였다.
배동필은 그것이 독약일 수 있다는 예감이 들어 사발을 나꿔챘지만 이미 절반을 마신 뒤였다.
《동필씨, 저는 가요. 가더라도 당신의 사랑만은 안고 가요. 부디 행복하길 바래요.》
《가겠으면 함께 가야지 혼자 가면 되는가!》
배동필은 손에 들었던 사발에서 남은 약물을 마셔버렸다.
이리하여 독약을 마시고 쓰러진 두 남녀를 하숙집 식모가 제때에 발견하고 병원으로 실어갔는데 의사들의 노력으로 의식이 회복되였다.
이애리수는 자신의 자살이 실패로 돌아가자 병원의 수술칼로 동맥을 끊으려고 시도하였으나 의사들이 제때에 발견하였기때문에 이 목적도 실현할수 없었다.
한편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배동필의 부모들은 이애리수를 찾아와 빌면서 그를 며느리로 맞이했던것이다.
이렇게 되여 이애리수는 가정으로 은퇴하였으며 그 이후에는 무대에 나서지도 않고 레코드취입도 하지 않았기때문에 음반에 남긴 노래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