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26세의 상임 지휘자 빌렘 멩겔베르크가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지휘하고 나자, 청중속에 있던 그리그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여러분은 이 멋진 오케스트라와 상임 지휘자를 자랑으로 여겨야 합니다".
한 오케스트라와 아주 오랜 시간동안의 작업이 지휘자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지, 아마도 멩겔베르크의 경우는 그러한 실험을 가장 먼저 치른 경우가 아닌가 싶다.
1895년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의 지휘대를 맡은 이래 약 50년동안 그는 이 악단을 이끌었다. 단원들은 지휘자를 신뢰했고, 비록 연습시간이 길어지는 일이 다반사였으나 그것은 지휘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신뢰감을 바탕으로 해서 멩겔베르크는 가장 짧은 시간 동안에 암스테르담 콘서트 헤보우를 유럽 최고의 명문으로 이끌어 올렸던 것이다.
네절란드의 유트레흐트 태생인 멩겔베르크의 음악은 쾰른에서 다듬어졌다. 이 젊은이가 암스테르담에 입성하기 전까지 거친 오케스트라라곤 요즘 귄터 반트의 조련을 받고 있는 쾰른의 귀르체니히 오케스트라 등 몇 군데 뿐이었다. 말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레퍼터리의 탁월한 해석으로 정상권에 돌입한 멩겔베르크는 1905년에 미국 지휘계에 등단한다. 1921년부터 약 10여년 동안 미국의 청중들은 이 전제적인 지휘자의 비교할 수 없이 깊은 낭만주의 해석을 향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밀월은 멩겔베르크가 1930년 미국을 떠남으로써 막을 내렸다. 바야흐로 토스카니니의 독주시대가 열린 것이다.
멩겔베르크의 레퍼터리는 프리츠 라이너의 그것만큼이나 확장되는데 신중에 신중이 기해졌다. 그는 결코 완성이 되지 않은 곡들을 연주회에 올리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자신과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가혹한 연습만을 필요로 했다. <틸 오일렌 슈피겔>처럼 작은 곡에도 거의 한 달 동안의 연습이 주어질 지경이었다. 그런 정련을 거친 그들의 음악이 극히 우아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