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열정적인 아티스트 비토리오. 그의 사전에 ‘대충’이라는 단어는 없다. 이탈리아가 낳은 걸출한 오페라 가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비토리오 그리골로는 로마에서 태어나 플로랑스 인근의 아레조 지방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당대 최고의 테너가 되었다.
필경 비토리오의 감성적인 목소리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그가 음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를 학교에 차로 바래다주면서 항상 오페라를 틀었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4살 때부터 집 주위를 맴돌며 아리아를 부르곤 했던 그. 그가 9살 되던 해, 한 남자의 운명이 점차 열리고 있었다. 로마의 한 안경점에서 노래를 부르던 꼬마는 드디어 ‘미니-테너’로서 발탁되게 되고 성 시스틴 성당 밤비노 소년 합창단에서 솔로파트를 맡게 된다.
그리고 나서 몇 년 후 아직 그가 십대일 때 로마 오페라 극장에서 파바로티와 함께 ‘토스카’를 부르는 영광을 맞이하게 되고, 그는 촉망 받는 오페라 스타로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를 갖게 된다. 로마 오페라극장 공연 후에 비토리오의 스타성을 예감한 파바로티는 깊은 감명을 받게 되고 언론에 ‘작은 파바로티(Il Pavarottino)’라고 소개하기도 한다.
그 후 18살이 된 비토리오는 비엔나 오페라 극단과 공연을 갖게 되고 23살이 되던 해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한 최연소 테너가 된다. 이러한 이력 때문인지 비토리오는 이탈리아 역사상 병역을 면제받은 최초의 남성이 되는 데 이는 당국의 비토리오의 타고난 재능이 헤쳐질까를 염려한 배려덕분이었다.
그는 자신의 ‘또 다른 열정’을 음악이 아닌 다른 분야에 쏟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바로 ‘자동차 레이스’였는데 이는 그의 여생을 통째로 바꿀 수도 있었다. 그는 Pre-3000 Formula 경주 대회에서 데뷔하며 레이싱계에 화려하게 데뷔하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차가 제가 타고 있던 경주용 차에 부딪쳤고, 전 로마에서 있을 예정이었던 공연을 취소해야 했어요. 갈비뼈를 다쳐 노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노래와 레이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어요.”
결국 노래가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차는 팔리고, 다신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테너에 대한 소명감은 그의 영혼 속에 불타고 있었고, 한 때 테너가 되길 바라던 아버지의 기대감도 컸다. 아버지는 말씀하셨죠, “나를 위해 해다오!” 외동아들을 둔 이탈리아 가정이라면 이 같은 상황이 자주 연출되겠지만 왜 하필 오페라인가? 모던 록이나 팝음악이 주류를 이루는 유럽의 서방문화에 젖어 있는 그와 같은 도시의 청년이 그렇게 전통적이고 힘든 장르를 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비토리오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전 정말 팝음악을 좋아해요, 하지만 오페라를 부르며 제 온 몸을 다 쓰고 싶었어요. 오페라에서는 내 몸 전부를 다 쓰니까요. 팝은 호흡을 주로 더 쓰지만요.”
“오페라를 하게 되면 반드시 횡경막을 이용하게 되죠. 마초가 되기도, 군대를 다 가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구요, 또 음악도 알아야 하고 템포도, 음표도 알아야 하고”라 말하며 그는 잠깐의 예를 보여준다. “만일 팝음악을 부른다면 목에서 노래 소리를 끌어올리죠.” 하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려준다. “하지만 오페라를 부른다면…” 하더니 잠시 숨을 멈추고 심상치 않은 깊이를 느낄 수 있는 톤의 목소리를 뽑아 내 보인다. 캐주얼하고 여름 햇빛에 살짝 태운 듯한 부드러운 외모를 가진 비토리오. 어느 누가 이런 외모를 가진 사람이 이토록 범상치 않은 내면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상상이나 할까?
오페라 씬을 대표하는 국제적 아티스트로서 오페라에 자신의 일생의 반을 바친 비토리오. 일본과 미국, 세계 각지에서 공연을 하던 그는 절대 절명의 도전에 맞닥뜨리게 된다. 라 스칼라에서 공연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리프’ 역할을 미국 억양과 강세를 무시한 채 노래를 부른 것. 강세는 쉽게 와 닿지는 않았지만 많은 관객의 박수 갈채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리프의 갱 친구로 등장하는 토니를 연기해 토니 소프라노로 더 유명해진 배우 제임스 간돌피노와 함께 공연하게 된다. 정말 이 두 오페라 가수들의 만남은 정말 상상도 못할 일이었을 것이다.
비토리오가 다른 장르의 음악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공연 중반쯤이었다. “갑자기 운명처럼 전 에릭 게나시아[엘튼존, 파바로티, 사피나와 함께한 제작자이고 현재는 비토리오의 매니저]를 만났고 에릭의 오랜 친구인 로마노 무슈마라[파바로티, 살리나, 셀린 디온과 함께 일한 이탈리아의 존경 받는 작곡가]를 만나게 되었죠. 로마노가 저에게 자신이 만든 노래 중 하나를 불러보라고 했고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지만 조금 부르기 시작하자 그의 노래가 제 목소리에 착 달라붙기 시작했죠. 그리고 아 나도 할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오페라의 감정과 팝의 즉흥적인 감흥은 비토리오의 데뷔 앨범인 [In The Hands Of Love]를 만들었다. 그의 음악적 목표는 오페라나 팝 어느 한쪽에 치우쳐지 않고 자신의 음악을 듣는 모든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그는 로마에서 레코딩한 자신의 첫 앨범에 대해 매우 만족했다. “전 다른 크로스오버 뮤지션들과는 달라요. 좀더 뭐랄까…”하며 알맞은 단어를 찾는 비토리오. 결국 그가 던진 한 마디는… “더욱 진실하죠.””
이번 앨범이 처음으로 비토리오의 빛나는 목소리를 담은 앨범이기 때문에 그는 오페라 마니아들도 충분히 공감 할 수 있는 앨범이라 자신한다. 그가 자신의 본디 장르를 떠나지 않았다는 이야기 일 것이다. 그가 에릭 게나시아와 유니버설과 계약을 하며 요구한 조건은 1년에 3개의 오페라 작품을 공연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쉬지 않고 기름칠 하겠다는 계획인 것이다. “오페라는 제 목소리를 위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연습 안 하면 지금 가진 테크닉을 다 잃어버릴 거에요.”
어찌됐든 비토리오는 팝음악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장르에 자신을 맞춰가는 것에 지금 그는 몹시 흥분되어있다. “난 계속 배우고 싶어요. 어딘가에 도달하게 되면 그건 배움을 멈추는 거니까요.” 그는 자신만의 팝음악을 알고 있다. 이미 그의 집 CD장에는 U2와 오아시스의 앨범이 꽂혀있기도 하다. 그리고는 팝스타들도 클래식에 도전해봤으면 좋겠다면서 한 아티스트에 대한 칭찬으로 회답한다. “버밍험에서 로비 윌리엄스를 만났는데 ‘오 솔레미오’를 같이 불렀어요. 정말 좋았는데 그래도 레슨이 조금 필요하겠던 걸요.”
“전 이미 팝 음악인으로 살고 있는 거죠. 오토바이를 타고 신나게 질주하는 것도 그렇지 않나요?” 아마 당신은 테너 성악가가 그러리라곤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 오토바이를 즐겨 타고 로비 윌리엄스에게 무언가를 레슨 해줄지 이리저리 살피는 2006년 이탈리아 출신 최고의 남성 팝페라 솔로 비토리오 그리골로. 이제 그가 진정한 노래란 무엇인지 당신이 직접 보고 듣고 느끼게 해줄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