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목포시 출신이다. 본명은 이옥례(李玉禮)이나 호적에는 이옥순(李玉順)으로 기록되어 있다. 1923년 목포공립여자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졸업을 하지 못하는 등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 자랐다.
1932년에 목포에서 극단 태양극장에 입단하면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이난영이라는 예명도 이 무렵 얻었다. 1933년에는 태평레코드에서〈시드는 청춘〉을, 오케레코드에서는 〈향수〉를 발표하여 정식으로 데뷔했다. 1943년까지 오케레코드 전속가수로 활동하며 오케의 간판 스타 역할을 했다.
1935년에 일제 강점기 최고의 인기곡이자 한국 가요사의 불후의 명곡으로도 불리는 〈목포의 눈물〉을 발표하면서, '가왕(歌王)'이라 불릴 만큼 높은 인기를 얻게 되었다. 비음이 섞인 경쾌한 창법이 특징이며, 트로트와 신민요를 비롯하여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에 모두 능했다.
1936년에는 오카 란코(岡蘭子)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음반을 발표하였고, 1937년에 가수 겸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하였다. 이난영은 천재적 음악인이었던 김해송과의 결혼 이후 남편이 작곡한 노래를 부르면서 전성기를 보냈다.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도 김해송의 지도를 받아 유명한 작곡가가 되었다.
태평양 전쟁 종전 이후에는 무대 활동에 주력하면서 김해송이 이끄는 KPK악극단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김해송이 실종되어 혼자 자녀들을 키우면서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다.
1958년 동료 가수 남인수가 이혼한 뒤로는 사실혼 관계로 지내다가 1962년 남인수가 사망하여 다시 혼자가 되었다. 1963년에는 미국에 건너가 딸들이 결성한 그룹 김시스터즈와 함께 공연을 하였고, 1965년 삼일절 기념공연을 마지막으로 서울 중구 회현동에서 사망했다.
사망하기 1년 전인 1964년에 이난영의 일생을 극화한 《님은 가시고 노래만 남아》가 제작되었다. 목포를 상징하는 가수로서 목포에서는 시민들을 중심으로 이난영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있기도 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