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은 우리 나라에 음악 마니아 집단이 생성되기 시작하는 최초의 시기이자 들국화, 시인과 촌장, 김현식등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융성하기 시작한 때였다. 그리고 그 시절 <어떤날>이라는 그룹이 '잠시 왔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86년과 88년, 단 두장의 앨범을 발표하고 각자의 길을 떠난 이 듀오는 이병우와 조동익이라는 두 남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향후 이병우는 클래식 기타리스트로서의 길을 걸으며 개인적인 연주앨범들을 발표하며 이미 수많은 고정팬을 확보하고 있고, 조동익은 첫 독집앨범 발표와 함께 베이시스트이자 명실공히 국내 최고의 작곡/편곡/프로듀서로서 한국 언더그라운드 음악계에서 마이다스의 손으로 군림하고 있다. 그들이 음악이라는 하늘을 새처럼 날다가 지상에 떨어뜨린 2장의 앨범. 그 중 그들의 두번째 앨범이자 마지막 앨범인 <출발>은 전작에 비해 조금 더 간결하고 다듬어진 사운드로 완성되어 있다. 1,2집을 통틀어 버릴 곡이 하나도 없다는 말처럼 이 앨범의 싱글들 또한 모두다 출중하다.
'하루하루 내가 무얼 하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거진 엇비슷한 의식주로 나는 만족하더군'으로 시작되는 첫 타이틀 곡<출발>. 전체적으로 경쾌한 템포를 유지하는 이 곡은 틀에 박힌 일상 생활 속에서 특별한 꿈도 없이 살아가다가 문득 여위어가는 너와 어느새 길어진 자신의 손톱을 보며 새로운 변화를 꿈꾼다는 이야기. 시종 덤덤한 이병우의 목소리와 아침을 여는 햇살 같은 분위기가 잘 어우러진 곡이다. 두번째 곡 <초생달>은 내가 개인적으로 <어떤날>의 노래 중 가장 편애하는 곡이자 <어떤날>의 팬들이 최고로 꼽는 노래중 하나이다. '아무 약속없이 만날 수 있는 사람들, 별다른 얘긴 없지만 메마른 시간 적셔 주는 술잔을 기울이며...' 이병우의 우는 듯한 기타, 조동익의 조용하면서도 맑은 목소리가 어우러지는 이 노래는 곡도 곡이지만 초생달이 걸린 도시 한켠의 밤에 대한 노랫말이 한편의 시라고 생각될 정도이다. 아직도 나는 친구와 함께 술에 취해 밤길을 거닐 때면 꼭 한번쯤 이 곡을 함께 불러제끼곤 한다.
이병우의 <출발>에 대한 조동익의 화답가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병우의 일렉기타가 두드러지는 <하루>, 이어지는 이병우의 <취중독백>. 마치 한편의 프로그래시브 대작을 연상케하는 이 곡은 재즈적인 분위기를 바탕으로 피아노와 기타, 플룻으로 이어지는 아리랑의 선율이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일그러진 불빛이 날 조롱하듯 비웃는 나의 고향 서울을 문득 바라본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감싸주고 키워줄 나의 고향 서울을 힘껏 껴안고 싶다'. 자조적이면서도 애절하며 날카로운 사회적 풍자까지도 놓치지 않고 있는 이 곡은, 이병우의 다양한 음악적 역량과 함께 그의 깊이있는 생각들을 엿볼 수 있는 명곡으로 파격적이면서도 새로운 형식이 두드러지는 곡이다.
그에 반해 이어지는 <덧없는 계절>과 <소녀여>는 전형적인 발라드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향후 90년대를 이끌어 가는 싱어 송 라이터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한 남자와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소녀여>는 보사노바풍의리듬에 섞인 특유의 멜로디와 그림 같은 가사로 우리를 감동시킨다. '언젠가 눈이 없던 늦겨울에 내가 만났던 몹시도 추위를 타던 소녀... 쓰라린 찬바람에 얼어붙은 거리를 걸으며 귀에 익은 듯한 멜로디로 휘파람 불던... 밤새워 찾아 헤맨 아득한 곳 출렁거리는 바닷가, 발 끊긴 새벽바다 비린 바람에 기대고 앉아 짙은 보랏빛 수평선에 끝없는 사랑을 갖고 싶다던 소녀여-'.
그리고 이병우의 상쾌한 기타사운드와 함께 시작되는 <그런 날에는>. 마치 피에르 벤수잔의 크로스 오버 클래식 사운드를 연상시키는 인트로의 이 곡은 상업적으로 가장 히트(?)한 곡이기도 하다.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이병우의 <11월 그 저녁에>는 향후 이병우의 클래식 연주앨범에서 그가 고수하는 음악작 노선을 엿보게 해주는 곡으로 오로지 클래식 기타와 플룻만으로 이루어진 조용한 음악이다. 이병우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매력이 돋보인다.
이렇게 여덟 곡으로 채워진 이들의 두번째 앨범. 곡마다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글로써 표현한다는 것에 대해 큰 한계를 느낀다. 단순히 '아름답다','애잔하다' 등의 말로는 보여줄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다. 아마도 그것은, <어떤날>이 단순한 선율의 아름다움보다 '삶'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무게를 함께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며 이젠 한국을 대표하는 싱어 송 라이터가 된 뮤지션들이 공공연히 그들의 앨범을 찾아 다니는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하긴 나 자신도 그들의 앨범을 90년에 구입했으니 꽤 뒤늦게 그들을 접한 셈이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이 지닌 마력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증폭되는 모양이다. 이젠 해체지만 아직도 각자 왕성하게 음악활동을 하고 있는 이병우와 조동익. 이들의 재결합에 대한 기대를 어렴풋이 내비치며 글을 마친다.
by 김양수(muplie@hitel.net) at 페이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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