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c 1 | ||||||
---|---|---|---|---|---|---|
1. |
| 3:43 | ||||
1. 한 통의 유서를 썼습니다.
아니, 수십 통의 유서를 썼습니다. 그러나 찢고 또 찢고 차마 남편과 자식들에게 남길 수가 없었습니다. 무어 잘한 것 하나 없는 서푼도 안되는 몸으로 유서라는 사치스런 종언을 하겠습니까. 그래, 갈 때는 가더라도 그따위 한이 되는 증표는 남기지 말자. * 그저 아이들의 마지막 손이나 잡고 그저 남편의 얼굴이나 보면서 잠시 이웃집에 나들이 가듯 그렇게 가면 되는 것을, 유서 같은 건 쓰지 않겠습니다. 사치스런 유서 같은 건 정말 생각지도 않겠습니다. |
||||||
2. |
| 3:43 | ||||
당신이 죽으면
눈을 기증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나는 극구 반대했습니다. 당신의 그 극진한 사랑의 마음을 내 어이 모르리오만, 남아 있는 나는 언제나 꿈 속에서 눈 없는 당신과 만날 것입니다. 허나 나는 압니다. 이승에서 우리가 눈을 뜨고 산것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눈을 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그리하여 일생을 맹인이 되어 어둠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당신의 거룩한 생각에 미치지 못한 부끄러움이 오늘은 늙어버린 아리가 되어 시큼하게 눈두덩이 붉어집니다. 어쩌면 지금 당신이 병상에서 신음하는 것도 누군가의 아픔을 대신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쩌면 당신의 죽음마져도 누군가의 죽음을 대신하고 잇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 당신이 죽으면 눈을 기증하겟다는 것을 반대만 했지 당신이 대신 죽는 것을 반대하지 못한 나의 부끄러움을 오늘에야 깊이깊이 뉘우칩니다. |
||||||
3. |
| 2:36 | ||||
4. |
| 3:32 | ||||
병원에서 당신이 치료를 받고 있는 동안
나는 당신 옆에서 마음을 치료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링겔주사를 맞을 때 나는 마음의 정맥에 주사를 맞았습니다.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아픔을 치료하고 참지 못하고 쓰러질 것 같은 약함도 치료하고 작은 것에 감사하고 작은 것에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도 치료하고 구름처럼 피어 오르는 욕심도 치료하고 그냥그냥 인생을 포기해버리고 싶은 마음도 치료 하고 정처없이 어디론지 떠나버리고 싶은 울적함도 치료하고 조금씩 미워지는 서글픔도 치료하고 끝까지 사라하지 못할 것 같은 위태로움도 치료 하고 문득문득 미워지는 먹구름 같은 마음도 치료하고..... 병원에서 당신이 치료를 받고 있는 동안 나는 당신 옆에서 마음을 치료하고 있었습니다. 못난 이 마음을 치료받게 하기 위하여 어쩌면 당신은 스스로 고통을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
5. |
| 3:41 | ||||
먼 산에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창 가엔 흐드러지게 개나리가 피었습니다. 햇빛은 따뜻하고 봄나들이 가기 좋은 날, 나는 아랫목에 등걸처럼 누웠습니다. 남편은 내 옆에 앉아서 이마를 짚고 있고, 아이들은 책상에 앉아 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 말은 아니 해도 얼마나 같이 놀러가고 싶겠습니까. 손을 잡고 재잘거리며 산과 들로 맑은 기쁨을 얼마나 마시고 싶겠습니까. 햇빛은 저리 눈부시게 반짝이는데 한 번도 못 간 봄나들이가 오늘따라 뜨거운 눈물이 되어 마음속에 가득히 차오릅니다. |
||||||
6. |
| 2:52 | ||||
눈이 싸락싸락 내리는 날
나는 친구와 함께 간이역에 서 있었다. 오-버 깃을 세워도 추운 이 겨울, 하나의 원통형 난로에서는 무료한 시간이 찌직찌직 타오르고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아무런 생각도 없이 눈 내리는 창 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가끔 양은 주전자에서 엽차 끓는 소리가 나고 우리가 버린 추억들이 곱게 굽혀 유리창에 하얗게 성애로 피어 오르고, 친구와 나는 차가 올 때꺄지 아무런 말도 없이 창 밖을 내다보고 만 있었다. 이야기가 없어도 좋은 날에 그저 눈 내리는 풍경과 톱밥 타는 소리, 그리고 가끔 주전자 뚜껑이 덜컹거리거나 푸- 푸- 강물이 숨쉬는 소리. 우리는 그러한 자연의 소리를 귀담아 들으며 오래오래 말도 없이 서 있기만 하였다. 겨울은 자꾸만 길어지고, 그 길어진 통로를 비집고 간간 낭만과 꿈을 내려주는 눈을 바라보면서 기차가 섰다 가도 나는 그대로 서 있었다. 친구도 떠나고 아무도 없는 텅 빈 간이역, 깨끗하고 순결한 눈 속에서 나는 더욱 맑아진 눈 내리는 소리와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 그리고 하얗게 익어가는 한 장의 추억을 보고 있었다. 눈이 어둠으로 변할 때까지...... |
||||||
7. |
| 2:20 | ||||
약을 먹고 주사를 맞고
오만 가지 약을 써도 고통이 가라앉지 않을 때, 나는 스스로 죽고도 싶었습니다. 나 하나 죽으면 그만 가족들의 슬픔도 그만 이승에 자물통을 채우고 벌떡 일어나 저승으로 가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있어 달라는 사람이 있어 이렇게라도 살아있어야 한다는 사랑이 있어 나는 손에 든 자물통을 내던지고 말았습니다. * 아무리 아픈 고통이 와도 나를 필요로 하는 한 나에 대한 사랑이 있는 한, 나는 이 아픔을 이겨 나갈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이승에서 살것입니다. |
||||||
8. |
| 3:41 | ||||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아내의 병은 어찌하여 변함이 없습니까. 아니, 변하기는 커녕 점점 더 깊은 수령 속을 헤매입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최첨단 의료기기와 약품들이 쏟아져 나오는데도 결국 아내의 병만은 고칠 수가 없는 것입니까. 하느님! 이젠 무슨 단안을 내릴 때도 되지 않았 습니까. 어깨를 툭 치면서 '일어나라' 한 마디만 정말 한 마디만 해주십시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외에는 아내의 병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십년하고도 삼년, 그 동안 맞은 주사가 몇 천 대며 먹은 약이 몇 천 봉지가 되겠습니까. * 하느님! 이젠 거두어 주실 때도 된 것 같은데 얼마나 더 눕혀놓아야 하는 것입니까. 전생에 지은 죄가 그리 많다면 차라리 고통없이 데려가 주십시오. 더는 보지 못할 아픔의 하소연을 정말 이젠 듣고 보지 못하겠습니다. 원컨데 하느님! 제발 어깨 한 번 툭 치며 '일어나라!' 한 마디만 해주십시오. 그 한 마디만 내려 주십시오. |
||||||
9. |
| 3:42 | ||||
설풋 잠 들었다 눈을 뜨면
당신은 그대로 머리맡에 앉아계십니다 시간은 새벽 한시 그때까지도 잠을 안자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내가 푹 잠이 들어 세상만사 다 잊고 깊은 잠이 들때까지 지켜봐 주시는 당신 눈을 뜰때마다 손을 꼬옥 잡아 주시는 그 따슨 체온, 별빛처럼 아름답게 내 영혼에 새깁니다 이러다, 이러다 내가 죽으면 당신의 그 따슨 사랑이 그리워 정녕 저승에도 못 갈것 같습니다 당신이 나의 머리맡에서 나의 잠을 밤새 지켜봐 주시듯 내 영혼 또한 당신 곁에 머물어 간절한 마음으로 지켜봐 드릴 것입니다 |
||||||
10. |
| 2:18 | ||||
사랑합니다.
좀 못하고 어수룩하고 수더분한 당신 나는 그런 당신을 사랑합니다. 활활 타는 장작불과 같은 찬란한 사랑이 아니라 모닥불처럼 은은하고 다뜻하게 밤을 밝히고 가슴을 덥힐 수 있는 그런 당신을 사랑합니다. * 모두가 쬐다가 가버린 싸늘한 밤 꺼질듯 꺼질듯 남아 있는 불씨 하나, 그런 불씨를 다둑이면서 식어가는 밤을 덥히고 꺼져가는 사랑을 피워낼 수 있는 그런 당신을 사랑합니다. |
||||||
11. |
| 2:18 | ||||
당신을 사랑하다가
당신을 못견디게 사랑하다가 이대로 헤어질 사랑이라면 헤어져 잊혀질 사랑이라면 괴로운 병이라도 앓고 싶습니다 편작도 못 고칠 확실한 병 하나로 당신을 탕탕 못질해 놓고 나 혼자 아파하며 사랑하고 싶습니다 * 이대로 헤어질 사랑이라면 헤어져 잊혀질 사랑이라면 죽도록 병 하나를 사랑하고 싶습니다 죽도록 당신만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
||||||
12. |
| 2:20 | ||||
13. |
| 3:16 | ||||
밤새도록 눈이 내리는 도회지의 빌딩밑에서
삐꺽삐꺽 기계소리를 들으며 나는 안델센의 동화책을 펼칩니다. 각박한 삶을 위하여 잠시 잊고 있던 순수의 대문 앞에서 나는 내 몸에 묻은 먼지와 내 마음에 묻은 기름기를 떨어냅니다. 한 장의 문을 넘어 저토록 고운 눈이 송송 내리는데 깊은 동화의 나라에는 순순한 어린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냥팔이 소녀도 보이고 인어공주의 얼굴도 보이고 송아지, 말, 염소, 강아지 따위들이 마음을 풀어 놓고 뛰어다니는 것도 보입니다. 나는 갑자기 그들과 어울리고 싶어져서 눈 속으로 신나게 뛰어들지만 그들은 순식간에 멀리멀리 달아나고 맙니다. 아마 내가 너무 무서웠던지 내 몰골이 너무 추했던 모양입니다. 나는 그들이 사라진 언덕에 서서 가슴이 하나 둘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눈시울이 자꾸만 시큼거리며 기계소리가 삐꺽거리고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각박함이 분명히 내 얼굴에 덕지덕지 묻어 있었습니다. 잃었던 동화의 나라로 천진무구한 어린이들의 세계로 결국 내가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안델센은 나를 대문 밖으로 밀어 내고는 철컥 소리를 내며 동화책에 자물통을 채웠습니다. 잃어버린 내 어린 시절이 저 눈 속에서 하나하나 내려 쌓이고 나는 그 순순의 눈을 바라보면서 목을 축 늘어뜨린 채 마치 유형을 떠나는 죄수와도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