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시인은 80년대 한국 민족문학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그는 80년
대 사회변혁운동의 이념과 정신을 온몸으로 밀고나간 '전사(戰士)시인'
이며, 혁명적 목소리로 한국문단을 일깨운 '민족 시인'이다. 또한 청춘
의 10년을 감옥에서 보내는 등 반독재 투쟁에 앞장선 혁명 시인이었다.
1946년 전남 해남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호남의 명문 광주일고를 입학하였으나 입시 위주의 교육에 반대, 자퇴하였고 이후 검정고시로 전남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대학 재학중 '3선개헌반대투쟁'에 참여하는 등 반독재 학생운동에 투신한 그는 1972년과 이듬해에 전국 최초의 반유신투쟁 지하신문 '함성'과 '고발'을 제작·배포하여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고, 이후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1974년『창작과비평』에「진혼가」등으로 문단에 얼굴을 내민 김남주 시인은 이후 작가 황석영 등과 함께 '민중문화연구소' 등을 결성하기도 했다.
1978년 가장 강력한 반유신투쟁 지하조직 '남민전'의 '전사'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10월 4일, 80명의 동지와 함께 체포·구속된 김남주 시인은 이 사건으로 징역 15년형이 확정되어 광주교도소 등지에서 복역했다. 그는 옥중에서 교도관 몰래 수많은 옥중시를 써서 극비리에 유출했는데, 이 시들은 80년대 우리사회 변혁운동에 일대 도화선이 됐다. 또한 김남주 시인은 1988년 12월 21일 9년 3개월의 옥고 끝에 석방되기까지 80년대 한국문학의 빛나는 정점이자, 큰별이었다.
김남주 시인은 석방 이후 각종 재야집회에서 시낭송을 했는데 이는 만인의 심금을 울린 뜨거운 절창이었다. 디지털문화예술아카데미은 이 육성 시낭송을 사이버 상에 최초로 공개한다. 김남주 시인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민예총 이사 등을 역임하였고, 단재상·윤상원문화상을 수상하였으며, 서거 이후에 민족예술상이 수여되었다.
김남주 시인은 옥중투쟁에서 얻은 지병으로 투병하다가 1994년 2월 13일, 불과 마흔 아홉의 나이로 그 생을 마감했다. 2월 16일, '민족시인 고 김남주선생 민주사회장'이 치러져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안장됐다. 2000년 5월 20일, '민족시인김남주기념사업회'와 '광주전남작가회의' 주최로 광주 비엔날레공원 안에 대표작「노래」가 수록된 '김남주 시비(詩碑)'가 제막되었다. 유족으로는 박광숙 여사와 아들 토일 군이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