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민중가요 넘나든 ‘빛나는 예외’
한국팝의사건·사고60년 (66) 한돌과 신형원
≫ 한돌의 1980년 데뷔 앨범.
지금 기준에서 보면 1980년대에는 없는 게 많았다. 인터넷은 물론 피씨통신도 없었고, 케이블방송은 남의 나라 얘기였으며, 지상파 티브이 방송이라고 해봐야 한국방송과 문화방송 두 곳뿐이었다(교육방송은 논외로 하자). 그래서 대중음악을 소개하고 홍보할 통로도 많지 않았다.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 여의도 방송가는 대중음악 홍보의 거의 유일무이한 통로였다는 얘기다.
하지만 방송국을 통하지 않고 히트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1980년대 중반 들국화로 대표되는 이른바 신촌 언더그라운드의 성공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자연 속에서 노래를 캐며 이땅의 상처를 보듬다
성남의 아버지 약방에 잡혀온 그는 무려 8년을 머물렀다. 당시 그의 동네엔 수많은 영세 공장들이 난립해 있었다. 어느날 야학에 다녔던 한 단골 여공이 야학선생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우울해진 사연을 들었다. 그는‘짝사랑도 아니고 서로 좋아했지만 남자가 장가를 가버려 벌어진 이런 사랑은 무슨 사랑일까’를 생각하다‘외사랑’을 떠올렸다.
사전에도 없는 제목 때문에 노래가 발표되자 한글 협회로부터 문의전화를 받을 만큼 독특한 표현이었다.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70년대 후반이 되서야 가능했다. DJ친목회 총무 서희덕의 권유로 명동 카톨릭회관 여학생회관에서 정기적으로 열렸던 노래동아리‘참새를 태운 잠수함’무대에 다섯 차례 올랐다.
그래서...
한국적 정서의 멜로디로 음지를 덥혀준 '작은 돌'
고집스럽게 한글 사랑을 실천해 온 포크 아티스트 한돌. 전국을 돌며 숨은 노래를 캐 온 그는 조동진과 함께 1980~90년대 언더 가수의 양대 산맥으로 불린다. ‘여울목’, ‘조율’, ‘유리벽’, ‘불씨’, ‘못 생긴 얼굴’, ‘터’, ‘개똥 벌레’, ‘홀로 아리랑’ 등은 당시 한국적 향내를 진동하며 유행했던 그의 주옥 같은 노래들이다. 국토 사랑을 노래하고, 공장 노동자, 시장 상인, 판자촌 철거민 등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언어의 마술사처럼 담아 낸 그의 아름다운 노래들은 혼란스럽던 대중의 마음을 달래 주었다.
본명은 이흥건. 하지만 고교 졸업 후 여러 음악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포크 음악에만 전념하려는 의지로 본명을 버렸다. 한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