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주를 즐기기 위해 모인 밴드였지만 1993년에는 몇 번의 클럽 공연을 하게 되었고, 그러던 도중 베이시스트 최민호의 입대로 역시 주변의 지인이었던 김기현으로 교체되었다. 당시 멤버 전원이 학생이었던 관계로 93년 말에는 각자의 사정 때문에 더 이상 활동을 지속할 수 없게 되는데, 그 때 까지의 활동으로 자신감을 얻은 이들은 기록을 남기고자 데모 테잎 작업에 착수한다
윤병주가 이전에 록 밴드 터보의 기타솔로 세션을 하면서 알게 된 스튜디오에서 각자 주머니를 털어 녹음한 데모에는 〈Negative〉, 〈Into The Ground〉, 〈Rain Of Compromise〉(후에 〈타협의 비〉라는 제목으로 데뷔 앨범에 수록), 그리고 〈Dizzy Sunshine〉 등, 영어 가사로 된 네 곡의 자작곡이 수록되었다. 1994년 초에 하이텔의 메탈 동호회와 언더그라운드 동호회를 중심으로 소량배포된 이 데모는 아마추어답지 않은 음악과 데모답지 않은 양질의 사운드로 작지만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노이즈가든의 데모 테이프는 당시 인디씬의 대표적인 인기 데모로 기억된다.
1994년 봄에는 밴드 해산 후 잠시 블랙 신드롬에 서 활동하던 드러머 김태윤이 윤병주에게 다시 프로 지향의 노이즈가든을 만들자고 제안, 이번에도 역시 주변의 지인들인 박건(보컬)과 염재민(베이스)을 끌어들여 재출발하게 된다. 몇 개월 후 밴드의 미래에 불안감을 느낀 김태윤이 다른 밴드로 이적, 밴드는 드럼을 공석으로 남겨둔 채 가을에 '제1회 톰보이 록 콘테스트'에 참여한다. 대상의 경우 상금 1,000만 원에 독집 출반이라는 유례없는 규모의 이 대회에서 〈Rain Of Compromise〉로 대상을 수상했지만(드럼은 임시 세션을 기용), 노이즈가든은 독집앨범 제작시 상업성을 조건으로 내건 주최측 음반사의 요구를 거절한다. 그 후 드러머에 박경원을 맞아들여 약 2년간 홍대앞 최초의 록클럽인 록월드를 비롯한 클럽 공연을 계속한다.
1996년, 조건 없이 양질의 록 앨범을 제작하고자 하는 뜻있는 제작자를 만난 노이즈가든은 5월부터 녹음에 착수, 안양의 태광 스튜디오에서 2개월에 걸쳐 첫 앨범 《Noizegarden》 을 제작한다. 밴드의 리더인 윤병주가 프로듀서를 겸임하면서 제작한 이 앨범에서는 염재민의 군입대로 노이즈가든의 라이브 사운드 엔지니어를 맡아 주던 이상문이 베이시스트로 참여했다. 일면 거칠게 들리기도 하지만 라이브와도 같은 느낌과 질감을 최대한 살린 이 앨범의 마지막 마스터링 과정은 유명한 미국의 A&M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졌다. 그 밖에 이 앨범에서는 초대 베이시스트인 최민호(〈우주꽃사슴〉)와 녹음기간중 군에서 잠시 외박을 나왔던 염재민(〈묻지 말아줘〉와 〈타협의 비〉)의 연주도 들을 수 있다.
1997년 말부터 준비에 들어갔던 두번째 앨범은 1998년 가을에 본격적인 제작에 착수, 1999년 2월에 《...But Not Least》 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다. 1집과 마찬가지로 미국 A&M 스튜디오의 데이빗 콜린스에 의해 마스터링되었다.
이후 1999년 10월에는 국내 록 밴드로서는 최초로 서울 팝스 오케스트라와 예술의 전당에서 협연을 펼치기도 했으나 곧이어 리더이자 기타리스트 윤병주가 밴드를 탈퇴하였으며 얼마 후 밴드는 해체되었다.
박건의 캐나다 이민을 즈음해서 2009년 2월 14일 밴드 해체 10주년 기념 공연을 하였다.보컬리스트 박건이 한국에 돌아오기 전까지는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공연이 될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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