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그 위대함 속에서 사랑하는 것. 그것은 위대함을 피나는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다. 낙담해 있을 때는 이를 악물고 참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음악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도전해 주는 것이다. 음악의 매력에 이끌리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절대로 끊을 수 없는 강한 유대를 만들고 국경이 없는 왕국을 만들기 위해 음악에 대한 사랑을 확대해 가는 것이다.”
푸르니에의 음악인생을 압축한 말이다. 그는 9세라는 어린나이에 소아마비에 걸렸고, 이후 장애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크게 상심했으나 주변의 많은 도움과 자신의 노력, 그리고 음악의 힘으로 세계적인 첼리스트가 되었다. 그의 음악은 따뜻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뇌하는 면이 결여된 것은 아니다. 그가 프랑스인이란 것도 여기에 한몫을 하고 있다.
파리에서 태어난 푸르니에는 처음에는 피아노를 하려 했다. 하지만 소아마비로 오른쪽 다리 전체가 부자연스럽게 되었다. 그 때문에 항상 앉아서 연주할 수 있는 첼로를 택했으나 불편한 다리로는 보통사람보다 몇 백배나 더 힘들었다. 다만 그의 성품과 악기의 성격은 잘 맞았다. 12세에 어렵게 파리 음악원에 입학한 그는 26세이던 1932년, 늦은 나이에 음악원을 수석 졸업했다. 이후 그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불구하고 국외 연주여행길에 자주 올랐다. 프랑스 정부는 그 공로로 그에게 레종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
1937년, 코르토, 티보, 카잘스가 창립한 에콜 노르말 음악원에서 첼로와 실내악 교편을 잡았고, 41년에는 파리 음악원 교수가 되었다. 전쟁통임에도 그의 연주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가 음악으로 전파하는 사랑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은 너무도 많았다. 그는 교육활동을 잠시 멈추고 연주에 전념했다.
전쟁이 끝나고 슈나벨, 켐프, 박하우스, 루빈슈타인, 굴다 등과 함께 연주하며 ‘평화와 사랑’을 전파했다. 56년 제네바에 정착한 후 피아니스트인 아들 장 피에르 푸르니에의 도움으로 마스터 클래스도 열었다. 아들은 훌륭한 실내악 파트너이기도 했다. 그의 동생인 장 푸르니에도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이름을 날렸다.
푸르니에는 ‘첼로의 왕자’로 불릴 정도로 귀족적이고 우아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거기에 소탈함과 단정한 양식감, 균형감 등의 고전적 정신이 보태져 정갈한 음악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음색도 아름답고 따뜻함이 넘쳐났다. 이런 모든 바탕 위에 인간애가 더해져 격조 높은 기품이 느껴지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그는 프랑스 근대 작품들에도 능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