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로 세상을 이끄는 가인 김용우
"민요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사회에 만연하는 개인주의, 배금주의에 대한 처방이 바로 민요 속에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민요는 땀의 소중함과 공동체 의식을 일깨워 주는 노래입니다." 젊은 소리꾼 김용우. 86년 대학에 들어간 훤칠한 키에 안경 너머로 보이는 서글서글한 눈빛. 맑고 청아한 목소리. 그는 스스로를 소리꾼이라 부른다. 그렇지만 그는 이름 앞에 대여섯 개의 관형어를 달고다닐 만큼 다재다능하다. 직접 작곡. 편곡을 하고, 어릴 때부터 익혔던 피리. 장구. 피아노 솜씨도 수준급이다.
91년 서울대 국악과 재학시절 이미 중요 무형문화재 제 41호 12가사의 이수자로 지정됐다. 여기에 공연 사회를 보면서 관객들의 흥을 돋우는 재담 실력도 프로 이상이다. 초등학교를 순회하며 여는 「어린이 국악교실」에서는 또 자상하고 재미있는 음악선생님이 된다.
하지만 한 우물을 파야할 때가 됐다. 사회가 그를 위해 비워둔 공백을 찾아 메워야 한다. 많은 생각 끝에 결정한 그의 「평생직업」은 국악 대중화에 이바지하는 소리꾼. 그는 대학 2학년 때부터 틈나는 대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민요를 익혔다. 국악을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면 시골 할아버지들은 서울에서 온 손자 대하듯 기쁘게 맞아 주었다. 낮에는 촌로들의 논, 밭일을 거들고 밤에는 막걸리잔을 함께 기울이면서 며칠을 묵기도 했다.
녹음한 소리로는 그 분위기를 잡아낼 수 없어 아예 그 자리에서 암기하고 몸으로 느끼고 오는 것이다. 1차로 채집한 소리들을 가지고 「옷 입히는 작업」에 들어갔다. 충남 태안 고성규씨(80)로부터 배운 지게소리에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미해봤다. 충남 홍성의 논매기 노래와 군밤타령은 아카펠라로 불렀다.
제주 봉지가는 컴퓨터를 이용해 편곡했고 액막이 타령, 강강술래 등도 메김소리를 코러스로 처리, 현대적인 감각에 맞게 변화를 주었다. 이렇게 만든 8곡의 노래가 그의 첫 독집 「김용우의 지게소리」에 실린 것이다.
"서태지의 「하여가」처럼 제 노래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지야 않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계속 국악에 변화를 시도할 겁니다. 1회성으로 그치지는 않겠습니다." 그는 건강한 메시지를 담은 국악이 따분하지 않고 청소년들이 즐겨 부르는 랩만큼 히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그는 68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났다. 조선 세종 때 아악을 정리, 국악사에 획을 그었던 난계 박연 선생의 고향이 영동이니 그의 국악 인생의 시작은 운명인 셈이다. 영동은 지금까지도 해마다 난계 선생을 기리는 예술제가 열릴 정도로 국악의 토양이 비옥하다.
유년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국악기 소리에 파묻혀 자랐다.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으로 꽹과리를 잡았다. 이땐 모든 것이 타악기로만 보여 사기그릇과 밥그릇을 엎어 놓고 젓가락으로 두드리는 등 갖은 말썽을 다 피웠다고 한다. 중학교에 들어가선 학교 국악반에서 피리를 불었다. 꽹과리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아무나 상쇠가 되는 것은 아니라며 선배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지도교사는 가야금을 전공 했던 강형모 선생님. 강 교사는 자신이 어깨너머로 배운 피리를 소년 김용우에게 전수 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을 시험하기 위혀서였을까. 강교사는 이듬해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갔다. 그러나 피리에서 도무지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이른 새벽 대밭에 이는 바람소리처럼 정신을 투명하게 하고, 애간장을 녹이는 듯 구슬픈 소리가 소년의 맑은 영혼을 적셨다. 피리 독학을 시작했다. 스승도 교본도 없었다. 어쩌다 피리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동네에 오면 졸졸 따라다니며 한 소절 듣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는 입술이 부르트도록 불러 그 소리를 재현했다. 그에겐 우리 가락에 대한 천재적인 감각이 있었나보다. 독학 1년 만에 전국 국악 경연대회 중등부에서 1위를 했다. 어린 김용우에겐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고 자신이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암시받은 소중한 무대였다. 피리를 전공으로 서울 장충동에 있는 국립국악고와 서울대진도 들노래' 기능보유자인 고 조공례 선생에게 남도소리를, 인간문화재 오복녀 선생에게 서도소리를 익혔다. 타고난 「끼」와 재능에 훌륭한 스승까지 만났으니 그의 기예는 날로 자랄 수밖에. 타악기와 소리. 그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은 셈이었다. 92년부터 국악 실내악단 「슬기둥」의 멤버로 활약하면서 일본에서 열린 국제 타악기 페스티벌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가하는 등 국내외 공연도 숱하게 가졌다.
하나, 젊기에 그는 이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끊임없는 실험정신과 민요에 대한 자신감이 그를 대중들 앞에 세워 놓았다. 96년 출시한 '지게소리'에 이어 토속민요를 현대적인 음악으로 담아낸 '괴나리' 앨범을 발표한 그는 이미 3집 앨범 작업에 들어갔다. 애매한 국적의 각양각색 노래들로 들끓고 있는 한국의 대중가요계. 온갖 실험을 일삼는 그가 일으킬 「신선한 파문」이 기다려진다.
토속 민요에 현대의 옷을 입혀 그 투박함을 벗어 던지고 한(恨)과 흥(興)이 농축된 세련된 노래로 국악을 생활 속으로 끌어들인 이 시대의 젊은 소리꾼 김용우.
클래식, 재즈, 록, 테크노, 아카펠라 등 음악의 모든 장르를 넘나들며 거침없는 접목을 시도하는 그의 탁월한 음악적 어법은 이미 3장의 음반과 수많은 라이브 콘서트를 통하여 젊은 층의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으며 대중들에게 이 시대의 새로운 가객으로 각인시키고 있다. .... ....